| 오라리 방화사건(연미마을 방화사건)
연미마을은 제주4.3 비극의 서막을 연 오라리 방화사건의 현장이다.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 이후 4월 28일 김익렬 9연대장과 김달삼 무장대 사령관은 72시간 내 휴전과 투항하는 무장대의 신변보호 등을 담은 평화협상을 체결한다. 이렇게 진행되었더라면 더 이상의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흘만인 5월 1일 연미마을에 방화사건이 발생하면서 평화협상은 파기되고 이후 무장대에 대한 군경의 강경진압으로 3만여 명의 도민이 희생되는 비극을 초래하였다.
이 오라리 방화사건은 1948년 4월 29일 오라리의 대동청년단 단장과 부단장이 행방불명되고, 이튿날에는 동서간인 대동청년단 부인 2명이 무장대에 납치됐었는데 한 명은 탈출했지만 다른 한 명은 총살되었다. 5월 1일, 살해된 여인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대동청년단원들이 장례식을 마친 후 연미마을에 올라와 좌파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진 집들(5세대 12채)을 불태웠다.
당시 김익렬 연대장이 범인을 체포하고 우익청년들의 소행이라고 상황보고를 했지만, 미군정은 이를 묵살하고 무장대 강경진압을 전개했다. 미군정은 오라리 방화현장 상황을 촬영하여 기록(May Day in Chejudo)으로 남겼고 마치 방화사건이 무장대에 의해 저질러진 것처럼 편집해 놓았다.
| 마을이 불타던 날
1948년 11월 17일, 이승만 대통령은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고, 군경토벌대는 초토화작전이라는 강경 진압을 시작했다. 중산간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닥치는대로 주민들을 폭도로 간주해 학살했고 마을에 불을 질렀다.
1948년 12월 3일 이른 아침 연미마을에도 토벌대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주택 곳곳에 불을 놓기 시작했고 마을주민 전체를 폭낭거리 인근 밭에 모이도록 하였다. 이른 아침부터 갑자기 봉변을 당한 주민들은 아이부터 노인들까지 모두 두려움에 떨며 한곳에 모였다.
토벌대는 장전한 기관총으로 주민들을 위협하며 “아들 어디갔소?”, “남편 어디갔소?” 질문하며 바른대로 답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겁박하자 여인들과 아이들은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다. 다행히 뒤늦게 나타난 간부군인이 토벌대에게 철수명령을 내리면서, 주민들에게 “지금 즉시 한사람도 빠짐없이 아랫마을로 떠나시오”라고 하였다.
집단총살을 면한 주민들은 모두 이웃마을인 사평, 모오, 월구, 용담으로 피신하였다. 주민들이 떠나고 섯동네와 동동네는 모두 불태워졌고, 어우늘과 해산이는 며칠 후 불태워 없어졌다. 당시 제주의 중산간마을은 많은 주민들이 집단학살을 당했으나 다행히 연미마을은 폐허는 됐지만 집단학살은 면하였다. 그러나 4.3사건으로 인해 마을 주민 80여 명이 희생되거나 행방불명되는 피해를 입었다.
| 잃어버린 마을 어우늘(어은흘)과 해산이
■ 어우늘(어은흘)
민오름 바로 밑에 있는 마을로 4.3 당시 23가구에 90여 명의 주민이 모여 살았던 아늑한 마을이다. 4‧3 때 불 타 없어진 이후 주민들이 복귀하지 않아 잃어버린 마을이 되었다.
■ 해산이
마을 동남쪽에 위치했던 해산이는 9가구에 34명의 주민이 살던 아담한 마을이었다. 4·3사건으로 인해 마을 전체가 불에 타 없어졌고, 이후에도 주민들이 복귀하지 않아 잃어버린 마을로 남게 되었다.